빅터르 프랭클 선생님.. (죽음의 수용소)

2021. 4. 29. 23:43흥미로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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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사람에게 내 동료와 친구 P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그 친구가 왼쪽으로 갔습니까?"

"네"

내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마 저기로 갔을 거요."

이런 대답이 들렸다.

"어디요?"

그러자 그가 손가락을 들어 몇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굴뚝을 가리켰다. 굴뚝은 폴란드의 회색빛 하늘 위로 불기둥을 냄뿜고 있었다. 불기둥은 곧 불길한 연기구름으로 변했다.

"당신 친구가 간 곳이 바로 저기요. 아마 지금쯤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가 쉬운 말로 사실을 이야기해 줄 때까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 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환경에서 유난히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강인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신경학, 심리학적 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서를 읽어보면 어렴풋이 알수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인 빅토르 프랭클은 누구이길래 감히 인간의 초월적인 힘에 대하여 논하는 것인가. 

이 자의 경험이 담긴 책을 읽으면 확실히 알 수 있을것이다. 나치수용소에서 인간에 대해 누구보다 가까이서 경험한 이야기에 대하여.

 

빅토르 에밀 프랑클(Viktor Emil Frankl, 1905년 3월 26일 빈 – 1997년 9월 2일 빈)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신경학자이며 심리학자이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으며,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츠, 카우퍼링과 투르크맨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빅토르 프랑클은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이며, 오스트리아 정신요법 제3학파인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저서인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1959년에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1946년에 ‘Trotzdem Ja Zum Leben Sagen: Ein Psychologe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 meaning Nevertheless, Say "Yes" to Life: A Psychologist Experiences the Concentration Camp’ 라는 제목으로도 출판되었다.)는 포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며, 그는 이 책을 작성하면서 존재의 의미의 중요성과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의미를 찾았다. 빅토르 프랭클은 실존주의 상담치료의 핵심인물이 되었고 인간성 심리학(인본주의 심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24년에,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고등학생들을 위한 사회민주주의 청년 운동인 'Sozialistische Mittelschüler Österreich'의 회장이 되었다. 그가 의대생이였던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고등학생들을 무료로 상담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샬롯 뷔울러같은 심리학자들 또한 참여하였으며, 학생들이 성적표를 받았을 때 학생들에게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1931년에, 빈의 학생 중 단 한 명도 자살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성공은 프랭클을 베를린으로 초청한 빌헬름 라이히 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프랭클은 빈에 있는 스타인호프 병원의 신경학과와 정신과에서 그의 레지던트를 마쳤고, 여기서 그는 자살 충동을 가진 3000명 이상의 여성들을 치료했다. 1937년, 프랭클은 비엔나 알서 스트라세 32/12에 신경, 정신과 병원을 설립한다.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인수가 시작되고,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리안"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1940년에 프랭클은 로스차일드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정신과를 담당했다. 로스차일드 병원은 빈에서 유대인들이 입원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잘못된 진단을 하여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을 통해 몇몇 환자들이 안락사 되는 것을 막았다. 1941년 12월에 그는 틸리 그로저와 결혼했다.

1942년 9월 25일, 프랭클의 아내와 부모는 나치 테레시엔슈타트 게토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종합의사로서 일했다. 그의 정신 의학 기술이 알려졌을 때, 그는 정신 건강 관리를 위한 캠프를 설립하면서, B블록 4번 정신 병동에 배치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캠프를 만들었다. 나중에 레지나 조나스의 도움을 받아 자살 감시망을 만들었다. 1943년 7월 29일, 프랭클은 레오 백의 도움으로 테리엔슈타트에 있는 과학회를 위한 비공식적인 행사를 주최했고, '몸과 영혼', '영혼의 의학 치료', '수면과 수면 장애'를 포함한 일련의 공개 강의를 했다. 프랭클의 아버지 가브리엘은 테레시엔슈타트에서 폐부종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1944년 10월 19일,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0월 25일, 그는 다하우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5개월을 보냈다. 1945년 3월, 프랭클은 투르크하임으로 옮겼고, 미군에 의해 1945년 4월 27일에 해방되기 전까지 의사로 일했다.

어머니 엘사와 동생 월터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고, 아내 틸리는 베르겐 벨젠에서 죽었다.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는 오스트리아에서 호주로 이주한 여동생 스텔라뿐이였다.

 

빅토르 프랑클은 불안(고통)과 관련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양면성으로부터 오는 유한함과 한계가 '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에서 우리 인류 개개인이 저마다의 행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수있는 근원이 된다고 지적한바있다.[1]

  1.  Frankl, V. E. (1963). (I. Lasch, Trans.) Ma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New York: Washington Square Press. (Earlier title, 1959: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 Originally published in 1946 as Ein Psycholog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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